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국-독일 해군조약 (문단 편집) == 배경 == 1차 세계대전 발발시까지 영국의 목표는 최소한 세계 2위의 해군국과 3위의 해군국을 합친 수준의 해군력을 보유하는 것이었다.[* 1889년 제정된 해군 방위법을 배경으로 한다. 이를 이국 표준 정책이라 부르며, 영어로는 Two-power standard 정책이라 한다.] 하지만 영국은 1920년대에는 [[1차대전]]으로 소모한 막대한 전비, 1930년대에는 [[대공황]]의 여파로 더 이상 이전처럼 건함 경쟁을 벌일 만한 국력이 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세계 최대의 해군국 지위를 잃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영국은 이를 위해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국의 반전 무드에 힘입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체결하여 건함 경쟁으로 국력을 낭비하지 않고서도 우호국인 미국과 함께 세계 최대의 해군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36년에 1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파기되었고 영국의 주도로 2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지만, 2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은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가 탈퇴한데다가 각국에 전운이 고조되는 분위기에서 아무도 안지켰다. 영국-독일 해군조약은 1차 런던 해군 조약이 발효중인 상태인 1935년 체결되었다.] 이 때는 [[미국]]은 우호적이긴 했지만 미국 정치권에서 고립주의적 외교 노선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맹은 아니었고, [[일본 제국]]은 [[태평양]]과 [[동남아시아]]에서의 영국의 이권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치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1935년 3월,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하면서 [[유럽]]에서도 전운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영국의 램지 맥도널드 수상,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 [[프랑스 제3공화국]]의 [[피에르 라발]] 외상이 이탈리아 스트레사에서 나치 독일의 재군비 선언에 대한 공동전선을 합의, [[스트레사 전선]]을 형성하였으나 영국은 이와 별개로 나치 독일과의 '''외교적 해결'''을 고려한다. 독일은 독일대로 히틀러의 도박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했으나 외교적으로 고립될 가능성이 커졌고, 영-이-프 3국과 모두 맞서는 것은 어렵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아울러 나치 독일의 외교관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중심으로 외교적으로 스트레사 전선을 무력화하고, 영국으로부터 실질적 권리를 보장받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안 그래도 외교적 해결을 고려하던 영국은 이러한 나치 독일의 타협적 태도와, 1934년 초 나치 독일이 [[폴란드 제2공화국]]과 불가침조약을 맺으며 당시까지 유럽에서 가장 전쟁위험이 높았던 독일-폴란드 긴장관계를 단번에 해소했던 전례를 보아, 좀 막나가는 면은 있지만 그래도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는 당시로선 지극히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게 된다.[* 당시 [[배후중상설]]을 굳게 믿던 독일 국민들은 '전쟁에 진 것도 아닌데 [[폴란드]] 놈들한테 억울하게 [[영토]]를 빼앗겼다'는 인식이 팽배했고, 이런 여론에 힘입어 [[바이마르 공화국]]은 단치히, 폴란드 회랑, 실레시아를 돌려 받을때까지 폴란드 제품의 수입을 거부하고 엄청난 수입관세를 매긴다. 이것이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이다. 이런 상황인 1933년에 히틀러가 집권하자 폴란드 제품의 관세를 대폭 낮추고,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 맺으면서 10여년간 끌어온 무역분쟁을 단숨에 해결해 버린다. 혹시라도 독일이 또 전쟁을 일으킬까봐 조마조마했던 유럽 각국들로서는 이 같은 결단을 지켜보고 '히틀러는 그래도 대화와 타협이 통하는 상대다'라는 매우 상식적인(?) 결론을 내리게 된다. 물론 [[폴란드 침공|히틀러의 속셈은 다들 아시다시피...]]] 여기에는 [[대공황]] 이후 급격히 약화된 영국의 군사력과, 유럽 최대의 산업국인 독일이 본격적으로 건함에 나설 경우,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의 [[건함 경쟁]]이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겹쳤다. '''원칙적으로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재군비 선언을 한 이상 그 시점에서 독일은 무제한 건함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다.''' 원래 1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독일은 영국의 뒤를 이어 세계 2위의 해군국이었다. 기술적으로도 산업적으로도 또다시 세계 2위 수준의 해군을 재건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적어도 영국은 그렇게 생각했다.[* 1897년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가 독일 제국의 해군 장관이 되면서 독일의 해군력은 대대적으로 커지게 된다. 이를 위협시한 영국 역시 건함경쟁에 뛰어들어 1898년부터 1912년까지 영국과 독일은 서로 엄청난 건함경쟁을 벌였다. 이 건함경쟁은 양국 국민들의 자존심 대결 양상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한 번 일어났던 일이니 영국 입장에선 또 독일이 해군력을 늘리겠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영국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 묶여서 주력함 수와, 주포 구경, 보유 톤수 등에 제약을 받으니 오히려 영국이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미국, 일본 등과 기껏 군축 조약을 맺어 놨는데 이걸 파기하고 다시 독일과 건함 경쟁하기는 싫었다. 이 시점에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벌여 베르사유 조약 이행을 강제하는 방법이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전간기]]의 영국은 정말로 전쟁까지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프랑스는 영국보다도 더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역 봉쇄 등을 통하여 독일을 압박하는 방법도 있는데 문제는 첫째 독일이 1934년 폴란드와 불가침 조약을 맺은 이상, 폴란드를 통한 물자 반입을 막을 수 없어 실효성이 없었고, 더 중요한 두번째 이유는 독일을 너무 몰아붙이다가 독일이 [[소련]]과 손을 잡는걸 두려워 했다.[* 이념적으로 나치와 공산주의는 물과 기름이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두 나라의 관계는 밀월관계에 가까웠다. 1호 전차의 시험 주행은 소련에서 행해졌고, 독일이 구하기 힘든 광물 자원도 소련에서 수출했다. 대신 독일에서는 소련에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국제사회에서 왕따 국가들이라 서로 사이가 좋았던 건데 영국 입장에서는 이게 정식 동맹 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무엇보다 이들이 정식 동맹관계가 될 경우 소련의 인력과 독일의 산업이 함께 프랑스를 몰아붙일 것이고, 독일에 대한 양면전선을 이용한 소모는 꿈도 못꾸기 때문에 그런 리스크를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국은 파시즘보다 공산주의를 더 두려워했기에 독일이 더 말이 통하는 상대라고 믿었다. 결국 영국 입장에서는 손 놓고 독일의 무제한 건함 계획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재군비를 인정하되 주력함 총 톤수의 35%까지만 보유하도록 제약을 걸고, 정치적으로는 영미가 주도하는 해군조약체제라는 헤게모니를 인정하고 수용시키는게 합리적이겠다고 판단한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